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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평유래
    • 부평은 예부터 인천지역과는 다른 권역으로 발전하여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주부토군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장제군으로, 고려시대에는 수주, 안남, 계양, 길주, 부평 등으로, 조선시대에는 역시 부평으로 불렸었다. 1914년 부천군 부내 면으로 편입되었다가 1940년에 와서 처음으로 인천부에 편입된 유서 깊은 고장 으로 지난 70년대 이후, 산업발달의 가속화와 대단위 아파트단지 조성으로 인한 급격한 구세팽창으로 2차례에 걸쳐 분구를 실시, 서구와 계양구를 각각 분리시키고, 1995년 3월 1일 구명칭을"북구"에서"부평구"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부평연혁
    부평연혁
    명 칭 서 기 비 고
    고구려 470 주부토군(郡) 설치 ※ 부평읍호(행정구역)의 시초
    통일신라 757 통일신라 757 장제군(郡) 설치
    고려시대 995 수주(州)로 승격 개칭 ※ 1080년 수주에 지주사 설치
    1150 안남도호부로 개칭
    1308 길주목으로 승격
    조선시대 1413 부평도호부로 승격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1914.3.1 부천군 신설로 부내면으로 강등
    1940.4.1 부천군부역 제2차 확장으로 부천군 부내면과 서곳면이 인천부에 편입
    → 부평과 서곳출장소 개설
    대한제국 (미군정기) 1945.10.10 인천부를 제물포시 개칭, 제물포시 부평·서곳지청 설치
    대한민국 1948.11.17 법률 제8호에 의거 인천시로 되고 부평·서곳지청을 출장소로 환원
    1968. 1 . 1 법률 제1919호에 의거 부평·서곳출장소를 통합 →"북구"로 명명
    1981. 7 . 1 법률 제3424호에 의거 인천직할시로 승격
    1988. 1 . 1 대통령령 제12367호에 의거 서구 분구(19개동)
    1988. 5 . 1 북구가 자치구가 됨
    1989. 1 . 1 법률 제4051호에 의거 경기도 김포군 계양면 일원을 북구에 편입
    1995. 1 . 1 법률 제4802호에 의거 인천광역시로 승격
    1995. 3 . 1 계양구가 분구(11개동)되고, "북구"의 명칭을 "부평구(21개동)"로 개칭
    1995. 7 . 1 최초의 민선자치 체제 출범
    1998. 7 . 1 민선2기 출범
    2002. 7. 1 민선3기 출범
  • 문화지역탐방
    • 부평구 관련 문화재
      선구지
    •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제염 시험지로 1908년 일본인 니까오꾸 오오꾸라가 중국으로부터 제염기술을 도입하여 이곳에 1정보(약3,000평)가량의 구역을 정해 제1염전 시험지를 만들었으며, 1912년에는 88정보로 확장하여, 인천경제의 활성화와 주민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나, 매립공사와 산업화의 물결에 떠밀려 지난 1969년에 폐지되었다.
    • 계양구에 있는 부평구문화재
    • 부평도호부청사 (유형문화재 제2호, 계양구 계산동 943번지)
      • 부평은 고려 의종 4년(1150)에 안남도호부가, 고종 2년(1215)에는 계양도호부가 설치되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종 13년(1413) 도호부가 설치되었다. ≪부평부읍지≫에 의하면 부평도호부 내에는 객사, 동 서헌, 삼문, 근민당, 좌 우익랑, 동 서책방, 사령청향청, 포도청, 훈무당, 부창 등 여러 채의 청사 건물이 있었다고 전하나 대부분의 건물은 부평국민학교를 건립하면서 철거되고 현재는 내아(동헌이라는 의견도 있음)로 보이는 건물만 남아 있다. 이러한 청사 규모는 인천도호부를 능가하는 것으로 이는 부평이 고려시대 이래로 내려온 웅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현재 남아 있는 내아건물은 당초 " ㄱ" 자형 건물이었으나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 ㅡ " 자형 건물로 변형되었으며 정면 6간 측면 2간 규모의 팔작지붕 도리집이다.
    • 부평향교 (유형문화재 제12호, 계양구 계산동 982-1)
      • 고려 인종 5년(1127)에 건립된 부평향교는 병자호란(1636∼37)때 불탄 것을 숙종 14년(1688) 현 위치에 재건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문헌(경기읍지 중 부평부읍지)에 의하면 당초 부평향교에는 일반적인 향교건물 배치인 대성전, 동 서 양무, 명륜당, 동 서 양재 이외에 전사청, 공수고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건축양식을 보면 대성전, 동 서 양무, 동 서 양재는 맞배지붕형식으로 되어있고, 명륜당은 팔작지붕 형식으로 되어 있다.
    • 계양 산성 (기념물 제10호, 계양구 계산동 10-1번지일원)
      • 이 산성은 삼국시대때 축조된 석성으로 일명 고산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부평의 진산인 계양산(394.9m) 동쪽 능선에 축조되어 있다. 성의 축조형식은 지형분류상으로 산정식에 속하며, 방법상으로는 내탁식으로 외벽을 잘 다듬은 돌로 쌓아 올리고 안쪽은 불규칙한 할석으로 쌓았다. ≪증보문헌비고≫ 〈관방성곽〉조에 의하면 " 이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둘레가 1937보(587m)이나 지금은 퇴락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고려해 볼 때 계양산성은 삼국시대 이래 부평읍의 성곽 역할을 담당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성과 관련된 전투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임진왜란때 명군이 전투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 욕은지 (문화재자료 제1호, 계양구 계산동 162)
      • 부평초등학교 교정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욕은지는 장대석을 쌓아 가로 18m, 세로 16m규모로 축조한 장방형의 연못이다. 연못 내에는 돌로 쌓은 작은 동산을 만들고 각종 초화를 심었으며 석교가 놓여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곳은 인조와 관련이 있다고 전하지만 인조는 부평에 거동한 적이 없어 실제로는 정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생부인 장헌(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1년에 한 차례씩 전배하였다. 특히 21년(1789)에 먼저 김포 장릉을 전배하고 부평 안산을 거쳐 현륭원(사도세자의 원)을 참배하였다. 이 때 정조는 부평에 주정(낮에 머뭄)하여 부사를 인견하며 활을 쏘고 이 곳 욕은지에서 손을 씻거나 관람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어사대 (문화재자료 제3호, 계양구 계산동 162)
      • 어사대는 욕은지 동쪽 1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큰돌로 대를 만들고 중앙에 『어사대 광서정해 중수』라고 새긴 돌이 놓여 있다. 이 곳도 인근의 욕은지와 같이 정조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 정조가 김포 장릉을 전배하고 부평 안산을 거쳐 수원 화산의 현륭원(지금의 융릉:사도세자의 능)을 전배하러 가는 도중에 이곳에 들러 휴식을 취하며 활을 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정조는 활쏘기를 즐겨하여 수원행궁(임금이 거동할 때 묵었던 별궁)에 들를때마다 활쏘기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에게도 활을 쏘게 하였다고 한다. 당초 이 곳 어사대 후문에는 정자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현재는 고종 24년(1887) 중수하였다는 표지석만 남아 있다.
  • 부평구 문화인물
    • 이희목 (신라말 ∼ 고려초)
      • 이희목은 신라말 부평지방의 호족(豪族)으로 부평 이씨의 시조(始祖)이다. 고려가 건국하자 태조 왕건(王建)은 부평고을에 와서 주권을 잡고 있는 이희목을 달래 높은 벼슬을 내려 부평고을을 무혈(無血)로 점령하였다. 그리고 고려태조는 이희목에게 고려개국벽상공신(高麗開國壁上功臣)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봉작하고, 그의 아들을 기인(其人)으로 삼아 개경(開京)으로 데려갔다. 그 후에도 그의 자손에게 벼슬을 내려 요직에 등용하였다. 시호(諡號)는 충민(充敏)이다. 그의 증손인 이정공(李靖恭)은 시어사문하시랑(侍御史門下侍郞)을 지내고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러 부평백(富平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부평을 본관(本貫)으로 세계(世系)를 계승해 왔다.
    • 김인수 (신라말 ∼ 고려초)
      • 김인수는 수주 김씨(樹州金氏)의 시조(始租)이다. 그는 부평고을의 호족으로 부평 이씨와 쌍벽을 이룬 문벌이다. 후손에 소감(少監)을 지낸 김정실(金鼎實)이 있고, 그의 후손은 번성하여 평안남북도 지방에 수백호가 살고 있다고 한다.
    • 이정공 (고려 문종 ∼ 숙종)
      • 이정공은 고려 개국공신 이희목(李希穆)의 증손이다. 그는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지냈다. 문종 13년(1059)에는 예부외랑(禮部外郞)을 지냈으며, 이어 남원부사(南原府使)가 되었다. 재직중 삼예도(三禮圖) 5천부와 손유자서(孫柳子書) 92부를 신조하여 문종에게 바쳤는데, 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상으로 의상을 내렸다. 그리고 내직에 임용되어 한림학사(翰林學士), 예부상서(禮部尙書), 병부상서(兵部尙書), 태자빈객(太子賓客), 참지정사(參知政事), 수국사(修國史)등의 요직을 지냈다. 문종 37년(1083)에는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고, 선종때는 문하판상서이부사(門下判尙書史部事)를 지냈다. 숙종 2년(1097)에는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숙종 4년(1099) 5월에 그가 죽으니 왕은 애석하게 여겨 조위교서를 내려 부평백에 봉작하고 시호를 문충이라 하였다. 그리고 순종묘정에 배향하였다.
    • 류흥정 (고려말 ~ 조선조초)
      • 류흥정은 부평 류씨로 고려말에 낭장을 지냈다. 고려시대 당시 부평 고을에는 부평 이씨, 수주 김씨, 부평 류씨, 부평 박씨 등이 대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부평 류씨는 살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다른 류씨로 통합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 이 의 (고려말, 조선초)
      • 이의는 부평 이씨로 고려말 벼슬을 한 사람이다. 고려가 망하자 그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여 절개를 지키고자 두문동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태조는 이 의를 불러내어 새 나라 조선에 출시를 권하였으나, 끝내 이를 거절하고 말았다. 그러자 태조는 이 의의 가산을 몰수하고 자연도(영종도)로 귀양을 보냈다. 이 의는 영종도에서 고려에 충절을 지키며 일생을 마치었다. 그의 고고한 절개를 본받아 부평 이씨 문중에서는 충신과 효자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 열녀신씨 (조선조 명종)
      • 열녀 신씨는 조선 명종때 부평 고을의 영월 신씨집 처녀이다. 그가 9세때 집에 불이 났는데, 소녀의 몸으로 불더미 속으로 들어가 신주를 모시고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12세때 계모가 들어왔는데, 그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모시고, 효도하여 온 마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또 그가 출가하였는데 남편인 이명환이 병이 들자, 신명을 다해 보살피고 간호하였다. 남편이 급기야 죽자 그는 장례를 정중히 치르고 졸곡날 그는 남편을 따라가겠다고 자결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열녀정려가 내려졌다.
    • 이계록 (조선조 선조)
      • 이계록은 부평 이씨로, 자는 중수이고, 중종 23년(1528)에 부평고을에서 출생하였다. 선조 15년(1582) 사마시에 급제하고 참봉이 되었고, 선조 24년(1591)에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임진왜란 때에는 연안성을 수호하였고, 정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이 되었다. 그후 춘방대각에 오르고 의인왕후의 만사를 지었다. 선조 35년(1602)에 사망하였데, 나라에서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이예수 (조선조 선조)
      • 이예수는 부평고을 사람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남포현감으로 있을 적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의병을 모집하고 인솔하여 전주전투에 참전하였다. 그는 치열한 전투에서 많은 적을 사살하였다. 그때 엄지손가락이 부상을 당하자, 왼손으로 활을 당겨 적을 무찔렀다. 그러다가 결국 적의 총탄에 전사하였는데, 나라에서는 그의 전공을 높이 찬양하여 형조판서를 추정하였고, 충신의 정려가 내려졌다.
    • 이제가 (조선조 선조)
      • 이제가는 부평사람으로 전주 이씨 효령대군의 후손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이 되었다. 북청 판관 재임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조정에서는 전란을 피하기 위하여 왕자 위를 북청으로 보내기로 하고 지원군 윤탁연이 왕자를 모시고 북청에 머무르도록 하였다. 이때 왜장 가등청정의 대부대가 북청을 통과할 때 이제가는 부하를 거느리고 왜병과 격전을 벌였는데 중과부족이라 용감히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 사실이 나라에 보고되니 그에게 벼슬을 높혀주고 충신의 정려가 내려졌다.
    • 이언복 (조선조 선조)
      • 이언복은 부평고을 사람이다. 소년시절부터 부평향교의 학생으로 자랐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왜병이 부평고을에 와서 부평청사와 향교에 불을 질러 그 일부가 소실되었다. 그 때 이언복을 비롯한 박무영, 박대양 등은 향교에 모셔진 공자와 열성들의 위패를 계양산정에 있는 장사굴에 은밀히 천양하였다. 이후 공로가 인정되어 나라에서는 생원의 직함을 내리고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 서채량 (조선조)
      • 서채량은 장서 서씨로 부평부 동소정면 구산동 출신이다. 평소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께서 노환으로 병석에 있을 때 위중하여 백방으로 약을 구해 드려도 차도가 없었다. 그때 어느 의원이 그 병에는 호랑이 간이 특효라는 말을 듣고 호랑이 간을 구하기 위하여 노력을 다하였다. 때마침 계양산 기슭기에 호랑이가 병이 들어 누워있다는 말을 듣고 그 호랑이를 잡아서 간을 내었다. 어머니에게 간을 들게 하여 소생하였다. 그후 이 사실이 알려져 그에게 사헌부 감찰이란 벼슬이 주어졌고 효자정려가 내렸다고 한다.
    • 자료출처 : 인천광역시 부평구청 http://www.icbp.go.kr/
  • 도서관 소장 부평 관련 도서
    도서관 소장 부평 관련 도서
    도서명 출판사 출판년도 자료실명 청구기호
    부평군읍지 인천시역사문화관 2005년 북구도서관(참고실) R911.55-인천역인-18
    부평사 제1편 부평사편찬위원회 2007년 북구도서관(참고실) R911.55-부평사부 v.1
    부평사 제2편 부평사편찬위원회 2007년 북구도서관(참고실) R911.55-부평사부 v.2
    부평의 역사 부평사편찬위원회 2007년 부개도서관2층
    (종합자료실)
    부평기적의도서관
    (성인도서)
    향토911.55-부89ㅂ

    AD911.55-부894ㅂ
    부평식물도감 부평구평생학습과 2010년 갈산도서관2층
    (종합자료실)
    AD480.25-송95ㅂ